닥플 플러스
뭐라카노, 저편 강 기슭에서
11월 1일, 시의 날을 맞아 한국의사시인회 회원들이 뜻깊은 가을 나들이를 떠났다. 이번 문학기행은 시인시대 발행인이자 박언휘종합내과의원장인 박언휘 시인의 초청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발길이 닿은 곳은 경주 건천읍 모량리의 박목월 시인 생가.
나지막한 토담과 소박한 초가지붕 아래, 시인이 어린 시절 거닐었던 마당을 천천히 걸으며 잠시 옛 풍경에 젖어 들었다.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목월이 바람결에 달려왔다.
삶의 비애를 향토적이고 절제된 언어로 빚어낸 목월의 시심이 이토록 순박하고 정갈한 흙과 나무의 풍경에서 비롯되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평생 사람의 생명을 돌봐온 의사들에게 목월의 맑고 따스한 시선은 그 어떤 명약보다 깊은 위로가 됐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오늘이 마침 시의 날이라는 사실은 이번 문학기행을 더욱 뜻깊게 만들었다. 서화 회장님이 목월의 동상 앞에 섰다. 미리 준비해 온 시집을 꺼내듯 가슴속에서 목월의 이별가를 꺼내 낭송하기 시작했다.
뭐라카노, 저편 강기슭에서/니 뭐라카노, 바람에 불려서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가는 뱃머리에서/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울릉도 출신 박언휘 시인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원조 경상도 억양을 한껏 살린 낭랑한 목소리였다.
오냐. 오냐. 오냐./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이별가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 하나가 놓여 있음이 분명하다. 저편 강기슭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바람에 흩어져 좀처럼 들리지 않아 뭐라카노, 뭐라카노를 거듭 되묻는다.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다시 만나 갈밭을 건너는 바람처럼 인연을 이어가자는 대목에 이르면 가슴 한편이 뭉클해진다.
생가 방문을 마치고 버스에 오르자, 일행 중 누군가가 박목월 시인의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 이야기를 꺼낸다.
서울의 한 대학에서 강의하던 시절, 목월은 문학을 사랑하는 한 여대생과 깊은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가정을 가진 중년의 시인과 젊은 제자의 사랑은 세상의 시선은 물론 스스로에게도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주변의 눈을 피해 제주 등지에서 한동안 함께 지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월의 부인이 두 사람이 머물던 곳을 찾아왔다. 원망하거나 책망하는 대신 옷과 생활비를 건네며 두 사람의 고단한 생활을 위로했다고 한다. 그 너그러운 배려 앞에서 두 사람은 깊은 충격과 함께 자신들의 사랑을 돌아보았고, 결국 이승에서의 인연을 접기로 했다는 것이다.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별가가 새롭게 다가왔다.
비록 시대가 변하고 사랑은 세월 속에 묻힐지언정, 시는 영원히 그 자리를 지킨다.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랑의 진실까지도.
박목월 생가를 뒤로하고 동리목월문학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에는 묵직한 여운이 함께했다. 김동리의 굵직한 허무와 구원의 세계, 박목월의 맑고 정갈한 서정이 한 공간에서 만나 빚어내는 문학의 아우라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유품으로 전시된 낡은 원고지와 빛바랜 펜, 손때 묻은 책들을 바라보며 회원들은 깊은 감회에 젖었다.
한 줄의 문장을 얻기 위해 밤을 지새웠을 문학적 고투와 고독은 생명의 위기 앞에서 밤을 밝히는 의사들의 삶과도 닮아 있었다. 청진기로 몸의 아픔을 듣고, 시의 언어로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일. 그것이야말로 의사이자 시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소명이 아닐까.
문학기행의 여정을 따라 마지막 목적지인 대구로 향했다. 대구 간송미술관에서는 겸재 정선 탄신 35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국보와 보물을 포함한 216점의 작품이 한자리에 모인 대규모 전시였다. 한 화가의 예술세계를 이토록 폭넓게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설렜다.
겸재 정선은 산을 그리되 중국의 산을 그리지 않았고, 물을 그리되 관념 속의 물을 그리지 않았다. 자신이 태어나고 살아온 땅, 두 발로 밟고 두 눈으로 바라본 우리 산천을 그렸다. 이것이 바로 진경산수화의 정신이다.
국보 금강전도 앞에 섰을 때는 한동안 발걸음을 떼기 어려웠다. 화면 가득 펼쳐진 금강산의 봉우리와 골짜기, 바위와 나무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를 이루고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하나의 산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수많은 생명의 개별적인 표정이 있었다. 사람의 몸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하나의 몸 안에는 수많은 기관과 조직, 세포가 저마다의 역할을 하며 살아간다. 어느 한 곳의 균형이 무너지면 다른 곳에도 파문이 번진다. 작은 균열을 발견하고 생명의 질서를 회복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의사의 역할이 아닐까.
저편 강기슭에서 들려오는 목월의 노랫소리가 겸재의 수묵 산수 속으로 스며들어, 온 산천이 찬란한 가을빛으로 물든 것일까.
명품 한정식과 구수한 돼지국밥, 동리목월문학관의 문학적 향기, 간송미술관에서 만난 겸재 정선의 그림까지. 음식과 문학과 미술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그야말로 삼박자가 맞아떨어진 멋진 여행이었다.
무엇보다 오늘의 문학기행은 대구를 대표하는 박언휘 시인의 세심한 기획과 넉넉한 배려 덕분에 가능했다. 일정과 경비까지 도맡아 준비한 시인의 수고에 우리는 그저 고마운 마음으로 그 행렬에 몸을 실었을 뿐이다. 누군가의 정성으로 마련된 여행은 언제나 돌아오는 길까지 따뜻하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자 우리의 마음도 덩달아 바빠졌다. 이제는 각자의 삶터로 돌아가야 할 시간. 서울로, 인천으로, 전주로, 그리고 대구로 잠시 한자리에 모였던 문학의 동행이 다시 일상의 궤도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한강이 가까워질 무렵, 차창 밖으로 스치는 강기슭을 바라보니, 아득한 저편 강 언덕에서 누군가 나를 향해 자꾸 말을 건네는 것만 같았다.
뭐라카노, 뭐라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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