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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물든 의료현장' 압수수색에 피습까지…의료계 수난시대
의료현장이 또다시 피로 물들었다. 소아응급실 압수수색을 둘러싼 논란이 채 가라앉기도 전 대학병원 진료실에서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흉기에 피습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 환자의 생명을 지켜야 할 진료실에서 의료진이 생명의 위협을 받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의료진을 향한 물리적 폭력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수사 과정의 진료권 침해 논란까지 겹치며 의료현장의 안전과 진료 연속성을 보장할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히 이번 세브란스병원 피습 사건은 2018년 고(故)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사망한 사건 이후 의료인 보호를 위한 법제도 개선이 이뤄졌음에도 유사한 참사가 되풀이됐다는 점에서 의료계에 충격을 안겼다.
이에 의료기관 내 보안장비와 인력 배치, 처벌 강화 등 기존 대책이 실제 진료현장의 위험을 막는 데 충분했는지 점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4일 서울 신촌에 위치한 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 진료실에서 교수가 흉기에 피습됐다. 피해 교수는 손과 두피 등을 다쳐 응급치료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환자를 진료하던 의료진이 진료공간에서 흉기 공격을 당했다는 소식에 의료계는 깊은 우려를 표했다.
의료진 대상 폭력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8년 12월 고(故) 임세원 교수는 진료 중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숨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의료인 폭행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의료기관 내 안전장비와 보안인력 배치를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은 의료법 개정안이 2019년 4월 국회를 통과했다. 이른바 임세원법이다.
하지만 법 개정 이후에도 의료진을 대상으로 한 강력범죄는 이어졌다. 법 개정 다음 해인 2020년 8월, 부산 북구 화명동의 한 정신건강의학과 병원에서는 퇴원 조치에 불만을 품은 환자가 의사에게 흉기를 휘둘러 숨지게 했다. 가해자는 2021년 살인죄로 징역 30년을 선고받았다.
2024년에도 진료실 흉기 범죄가 발생했다. 6월 19일 서울 강남구의 한 의원에서는 환자가 의사의 약 처방에 불만을 품고 진료실에서 흉기를 휘둘렀다. 당시 피해 의사는 어깨와 목 등을 다섯 차례 찔려 과다출혈 상태로 병원에 이송됐으며, 응급수술을 받았다.
당시 피해 의사는 의협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환자에게 죽을 뻔했다. 의사라는 직업에 회의감이 든다고 토로했다. 진료실 앞 금속탐지기 설치와 환자 가방 반입 제한을 고민하고, 병원을 다른 지역으로 옮기는 방안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의료인 보호를 위한 법제도적 장치가 마련됐지만, 진료실에서 의료진이 목숨을 잃거나 흉기에 찔리는 사건은 끊이지 않았다. 법 개정 이후에도 의료현장의 안전이 실질적으로 확보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의료기관 내 폭력은 특정 진료과나 공간에 국한된 문제도 아니다.
응급실에서는 환자와 보호자에 의한 폭언폭행이 반복되고 있으며, 외래와 병동 등에서도 의료진을 위협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의료기관 내 폭력이 특정 진료과나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진료현장 전반의 안전 문제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현행 제도는 의료기관 내 폭력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보안장비 설치와 보안인력 배치 등 안전관리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그러나 의료기관의 규모와 진료 특성, 공간 구조에 따라 위험 요인이 다른 만큼 일률적인 시설 기준만으로는 실제 위기 상황에 대응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비상벨 설치 여부를 넘어 흉기 난동 등 돌발 상황에서 의료진과 환자를 보호할 수 있는 대응체계가 작동하는지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의료계가 이번 사건을 단순한 개별 범죄로 보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의료진을 향한 폭력은 피해 의료인에게 신체적정신적 상처를 남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진료가 중단되고 다른 환자들의 치료 기회까지 침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아주대병원 소아응급실 압수수색 논란도 의료현장의 안전과 진료 연속성 문제를 부각시켰다. 응급의료 현장에서 발생한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의료현장의 특수성과 환자 진료의 연속성이 충분히 고려됐는지를 두고 의료계의 비판이 이어졌다.
의료진 피습과 수사기관의 강제수사는 서로 다른 사안이지만, 의료현장에서 의료진의 안전과 진료권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라는 과제를 동시에 드러냈다.
세브란스병원 피습 사건 이후 의료계 각 단체는 잇따라 성명을 내고 의료기관 안전대책의 실효성 강화를 촉구했다.
대한전공의협의회와 서울특별시의사회, 대한병원협회 등 각 지역직역 단체들은 의료인 폭력에 대한 엄정한 대응과 함께 의료기관의 보안비상 대응체계를 재점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 단체가 공통으로 요구한 것은 실제 현장에서 작동하는 안전대책이다. 비상벨과 보안인력 확충뿐 아니라 출입 통제와 흉기 반입 방지, 위기 발생 시 신속한 경찰 출동 등 구체적인 대응체계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응급실뿐 아니라 외래와 병동 등 의료기관 전반으로 보호체계를 확대하고, 피해 의료진에 대한 치료와 법률 지원 등 사후 대책도 마련해야 한다는 요구가 이어졌다.
정신건강의학과 의료계는 의료진 보호와 함께 정신건강 위기 환자의 치료관리체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5일 발표한 성명에서 의료기관 폭력에 대한 무관용 원칙과 실효성 있는 안전 인프라 확충을 촉구했다. 아울러 정신건강복지법을 전면 개정해 적기 치료를 가로막는 제도적 장벽을 정비하고, 입원과 치료의 책임을 가족이나 의료진에게 전가하지 않는 국가 책임 중심의 지원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밝혔다.
보건복지부와 법무부, 경찰 등 관계기관이 참여하는 범정부 정신건강 위기대응체계 마련도 요구했다. 위기 환자를 조기에 발견하고 치료가 중단되지 않도록 부처 간 협력과 연속적인 관리체계를 갖춰야 한다는 취지다.
대한정신건강의학과의사회도 고위험 환자의 적기 치료를 위해 입원 문턱을 낮추고 입원실 수가를 현실화하는 등 제도 개선을 촉구했다.
퇴원 이후 지역사회 관리와 외래치료명령제의 실효성을 높여 치료 공백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정신건강의학과 단체들은 정신질환과 폭력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정신질환을 앓는다는 사실만으로 폭력성을 단정할 수 없으며, 이번 사건의 구체적인 동기와 경위 역시 수사를 통해 규명돼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질환자에 대한 낙인보다 적절한 치료가 필요한 환자를 조기에 발견하고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대한의사협회는 5일 정례브리핑에서 의료진과 환자를 보호할 실효성 있는 안전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의협은 환자의 생명을 살리는 진료실이 언제든 흉기 난동과 폭력에 노출되는 위험 공간으로 방치된다면 사명감 하나로 버텨온 의료진은 극심한 불안과 공포 속에 현장을 이탈할 수밖에 없다며 진료실 폭력으로부터 의료진을 보호하는 것은 국민과 환자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필수적 사회 안전망이라고 강조했다.
정부와 국회에 사후 처벌 위주의 땜질식 대응에서 벗어나, 의료현장이 위축되지 않고 온전히 유지될 수 있도록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며 의료진이 더 이상 위협받지 않고 오직 환자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국가 차원의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촉구했다.
의료계의 요구는 의료기관의 보안 강화나 가해자 처벌에만 머물지 않는다. 의료진을 보호할 수 있는 현장 안전체계를 마련하는 동시에 치료가 필요한 환자가 적기에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정신건강 의료복지체계를 정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별 의료기관의 대응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인 만큼 정부와 국회가 제도 개선과 재정인력 지원에 나서야 한다는 요구도 커지고 있다.
임세원 교수 사망 이후 의료인 폭행에 대한 처벌과 의료기관 안전관리 의무가 강화됐지만, 진료실에서 의료진이 흉기에 노출되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사후 처벌과 개별 의료기관의 보안 강화만으로는 의료현장의 안전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다시 확인된 것이다.
반복되는 의료진 대상 폭력과 진료권을 둘러싼 논란 속에서 의료현장의 안전을 실질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대책 마련이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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