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플 플러스
인사동에서 들은 ‘바람의 말’- 마종기 시인을 만나다
진료실에서는 환자의 말을 듣고, 책상 앞에서는 아직 글이 되지 못한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의사이면서 시를 쓰는 사람들에게 이 두 가지 일은 중요하다.
지난 주말 오후, 따사로운 가을 햇빛이 내리는 인사동의 작은 식당에서 마종기 시인과 한국의사시인회 회원들이 만났다. 주영만(우리내과의원), 홍지헌(연세이비인후과의원), 서화(부천시민의원), 김연종(과학기술서기관), 윤태원(태원정신건강의학과), 고현심(열린병원 영상의학과), 박영미(이화의대 분자의학과) 시인 등이 함께 했다. 시와 의료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고, 편안한 웃음이 대화 사이를 이었다. 문학을 이야기하는 자리였지만, 우리가 나눈 것은 살아온 날들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관한 삶의 이야기도 있었다.
마침 나흘 전(10월 14일)에는 연세대학교에서 제3회 마종기문학상 시상식이 열렸다. 시집 보헤미아 유리를 펴낸 최하연 시인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연세의대총동창회가 2024년 제정한 이 상은 의술과 문학을 함께 걸어온 마종기 시인의 문학 정신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부담스러워하던 시인은 문학과 의학이 가까워지는 동력이 될 수 있다는 후배들의 설득에 뜻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상에도 문학과 의학을 이어보려는 마음이 담긴 것이다.
필자에게 마종기라는 이름은 오래전부터 한 편의 시와 함께 있었다. 등단하기도 한참 전인 2000년대 초반, 마종기 시인의 시 바람의 말에 매료돼 직접 영상시를 만든 적이 있다. 시에 어울리는 화면을 찾고 구절마다 장면을 맞추며 같은 문장을 여러 번 읽었다. 그렇게 읽은 시는 마음 속에서 쉽게 떠나지 않았다.
그날 간담회를 시작하며 필자는 바람의 말을 낭송했다. 혼자 읽던 시를 그 시를 쓴 사람 앞에서 소리 내어 읽는 느낌은 남달랐다.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편지를, 먼 길을 돌아 수신인 앞에서 펼치는 기분이었다.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이날 대화에서 필자는 시 속의 착한 당신이 고국을 가리킨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그동안 사랑하는 누군가를 향한 말로 생각했던 구절에 다른 깊이가 생겼다. 바람은 먼 곳에서 불어오는 그리움이었고, 그 바람을 받아줄 당신은 바로 돌아가고 싶은 나라였다.
마종기 시인이 직접 쓴 회고를 읽으면 이 시에 이르기까지의 사연을 만날 수 있다.
그는 군의관 복무 중 한일회담 반대서명에 참여했다가 고초를 겪었고, 제대 후인 1966년 미국으로 떠났다. 낯선 언어로 환자를 돌보며 수련받던 첫해는 혹독했다. 이후 전문의가 되고 의대 교수로 자리 잡았지만, 고국을 향한 마음은 결코 떠날 수 없었다.
한 때는 모교의 제안을 받아 귀국을 준비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생과 어머니가 미국으로 오게 되면서 그 계획은 무산됐다.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던 길이 닫힌 뒤, 깊은 상실 속에서 태어난 작품이 바람의 말이었다. 이 사연을 알고 나면 그 시의 다정함이 사뭇 다르게 들린다.
이어서 고현심 시인은 우화의 강 1을 낭송했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시를 건네고, 다른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다. 평소 각자의 진료실과 일상에서 써왔을 문장들이 한자리에서 만났다. 시를 쓴 사람도, 듣는 사람도 같은 식탁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새삼 정겹게 느껴졌다.
마종기 시인은 선배와 동료 시인들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박목월 시인은 젊은 날 목숨을 걸 듯 시를 썼으며, 좋은 시 한 편을 남길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는 마음이었다고 회고했다. 정현종 시인에 대해서는 시를 쓰고 생각하는 일을 삶의 첫자리에 두었으며, 자신을 지탱해온 것이 시였다는 뜻의 말을 전했다.
좋은 시 한 편을 남긴다는 것은 무엇일까. 누군가가 오래 기억하고, 힘든 날 다시 펼쳐 읽게 되는 싯귀 하나를 남기는 일. 필자가 젊은 날 읽은 바람의 말을 수십 년 뒤에도 기억하는 것처럼.
이날의 만남은 필자에게 시를 대하는 태도를 다시 돌아보게 했다. 바쁜 일과를 마친 뒤에도 왜 한 줄의 시를 쓰려 하는지, 오래 전에 읽은 시 한 편이 어떻게 지금까지 마음에 남아 있는지 생각하게 했다.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이날 들은 바람의 말이 진료실 한켠에서 오래 불어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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