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플 플러스
'빈칸' 안고 출발한 '일차의료 시범사업'
지역사회 일차의료 혁신 시범사업이 9월 29일 시작됐다. 동네의원이 50세 이상 환자를 등록해 1년 단위로 관리하고, 전담 인력이 교육과 상담, 방문진료까지 맡는다. 방향에는 이견이 없다. 행위별수가로는 보상받지 못하던 상담과 조정 업무에 처음으로 값을 매겼고, 환자는 그 서비스에 본인부담을 내지 않는다. 의료계가 오래 요구해 온 일이다.
그런데 사업의 틀이 될 운영지침은 시행을 코앞에 둔 9월에야 나왔다. 186쪽짜리 지침을 받아 든 참여기관들은 제대로 읽어 볼 틈도 없이 환자 등록에 들어가야 했다. 앱을 설치할 수 없는 환자의 예로 2G 휴대전화를 들어 놓았는데, 국내 2G 망은 2021년에 이미 사라졌다. 지침이 얼마나 서둘러 만들어졌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 앱이 참여의 전제 조건이라는 점도 따져 볼 일이다. 주치의가 볼 진료투약 기록은 서면 동의만으로도 넘어오는데, 스마트폰이 있어도 앱을 다루지 못하는 노인은 등록 문턱에서 걸린다. 더 큰 문제는 분량이 아니라 빈칸이다. 공모 때부터 비어 있던 핵심 사항들이 확정 지침에서도 그대로 비어 있다.
가장 급한 것은 위탁 검체검사다. 정부가 이 사업의 본체로 설계한 통합수가제는 등록 환자 한 명당 매달 정해진 금액을 주고, 그 의원에서 생기는 진찰검사처치의 건강보험 부담분을 모두 여기에 갈음한다. 당뇨병 환자라면 주치의는 주기적으로 당화혈색소를 확인해야 하고, 이 사업의 성과지표에도 당화혈색소 조절률이 들어 있다. 대부분의 동네의원은 이 검사를 수탁기관에 맡긴다. 그런데 통합수가제 의원은 공단 몫을 따로 청구할 수 없으니 수탁기관에 줄 검사비를 정산할 공식 경로가 없다. 지침에는 관련 규정이 한 줄도 없다. 사업은 이미 시작됐고, 검사는 매일 나간다.
고비용 환자에 대한 보전 장치도 마찬가지다. 등록 후 환자 상태가 나빠져도 분위는 1년 동안 바뀌지 않고, 예측을 크게 벗어난 환자의 비용은 온전히 의원 몫이다. 연중 재분류나 초과분 보전 같은 장치는 확정 지침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 사이 통합수가 일부 구간은 공모 때보다 내려갔다. 공모 조건을 보고 보상방식을 고른 기관들은 조건이 바뀐 뒤에도 선택을 되돌릴 수 없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에게는 더 직접적이다. 방문진료와 방문간호를 한 달에 한 번씩만 해도 1년이면 24회인데, 지침은 둘을 합쳐 18회로 묶었다. 이 환자들은 재택의료센터 같은 다른 방문 사업에 중복으로 참여할 수도 없다. 넉 달 치는 갈 곳이 없다.
평가는 더 늦다. 성과지표를 어떻게 계산할지는 내년 1분기 안에 안내하겠다고 한다. 1년차 평가 기간은 이미 흐르고 있는데 채점 기준은 나중에 나오는 셈이다. 의료비를 줄이면 가점을 주는 지표도 그대로 남았다. 이대로라면 의료비가 줄었다는 숫자만으로는 환자를 잘 관리해서 줄었는지, 필요한 검사를 미뤄서 줄었는지 가려낼 수 없다. 3년 뒤에는 그 숫자가 본사업 설계의 근거가 된다.
반영된 것도 있다. 의료급여 수급권자 처리, 방문서비스 별도 산정, 신규 등록 시 산정 기준은 정리됐다. 정부가 현장 의견을 듣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들었다면 끝까지 채웠어야 했다는 것이다. 남은 빈칸이 하필 돈이 오가는 정산과 성패를 가르는 평가에 몰려 있다.
시범사업은 운영하면서 고칠 수 있다. 하지만 고칠 수 있다는 말이 비워 둔 채 출발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위탁 검사 정산 기준은 당장 만들어야 하고, 평가 기준은 1년차가 끝나기 전에 공개돼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첫해 손실은 참여기관이 떠안고, 그 손실 위에서 나온 성적표가 일차의료의 다음 단계를 결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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