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플 플러스
중증응급의료 현장 남은 전문의에 '잔류 이유' 물으니?
중증응급의료 전문의들이 만성적인 인력 부족과 과로, 낮은 수가, 의료소송 등 구조적 어려움 속에서도 현장을 지키는 동력이 단순한 사명감이나 희생정신만은 아니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개인의 직업 정체성과 전문성, 환자동료와의 관계 등 다양한 내적 동기가 진료 지속에 영향을 미치지만, 이러한 동기는 지속 가능한 근무환경과 제도적 보호가 뒷받침될 때 유지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원은 최근 구조적 역경 속에서의 자발적 잔류: 중증응급의료 전문의들의 내적 동기 탐구 보고서를 발간했다.
김강문 건국의대 교수(의학교육학교실)가 책임연구를 맡았다. 연구진은 구조적 역경 속에서도 중증응급의료 현장에 남아 진료를 지속하는 임상 교수들의 경험을 심층적으로 탐색했다.
중증응급의료는 고강도 업무와 만성적인 인력 부족, 의료소송 위험 등 다양한 구조적 문제에 노출돼 있다. 이에 따라 전문 인력의 유입뿐 아니라 기존 인력의 이탈을 막고 현장 잔류를 유도하는 것이 중요한 정책 과제로 꼽힌다.
기존 연구는 주로 중증응급의료 인력의 번아웃이나 이직 의도에 초점을 맞춰왔다. 이번 연구는 반대로 구조적 어려움에도 현장에 남아 진료를 이어가는 전문의들의 경험과 그 배경에 있는 내적 동기에 주목했다.
연구진은 중증응급의료 전문의를 대상으로 심층 면담을 실시하고, 면담 내용을 분석해 현장 잔류에 영향을 미치는 인과적맥락적중재적 조건과 행동 전략, 결과를 구조화했다. 그 결과 총 81개의 하위 범주와 14개의 상위 범주가 도출됐다.
연구에서 중증응급의료 전문의들의 경험을 관통하는 중심 현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료하기로 나타났다.
참여자들은 구조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환자의 회복 과정에서 얻는 보람과 임상적 유능감성취감, 전공에 대한 만족감, 동료와의 관계 등을 바탕으로 진료를 지속하고 있었다.
반면 현장에는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구조적 역경이 누적돼 있었다.
만성적인 인력 부족과 과로를 비롯해 지속 가능한 진료체계의 부재, 낮은 수가, 과도한 사법리스크, 지방 응급의료체계 붕괴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연구진은 전문의들의 현장 잔류를 단순히 사명감이나 희생정신으로 해석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의사로서의 직업 정체성과 이상적인 의사상, 중증응급의료가 갖는 사회적 가치, 환자동료와의 관계 등이 구조적 역경을 견디게 하는 내적 자원으로 작용했지만, 이는 무조건적인 헌신을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연구 참여자들의 잔류는 개인적조직적제도적 조건이 유지되는 동안 성립하는 조건부 잔류에 가까운 것으로 분석됐다. 현장에 남아 진료를 이어가면서도 참여자들은 자신의 이탈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고려하고 있었다.
연구진은 중증응급의료 전문의의 내적 동기를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다.
첫 번째는 의사로서의 정체성과 소명 의식에 기반한 정체성 기반 동기다.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가치와 자신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의사상을 바탕으로 진료를 지속하는 유형이다.
두 번째는 임상적 숙련과 성장에 의미를 두는 전문성성장 기반 동기다. 어려운 환자를 진료하면서 자신의 전문성을 발전시키고 임상적 성취를 경험하는 과정이 진료 지속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세 번째는 환자동료후학과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관계공동체 기반 동기다. 환자와의 관계뿐 아니라 함께 일하는 동료, 후배 의료진과의 유대감과 공동체 의식이 현장 잔류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네 번째는 자신의 역할에 한계를 설정하고 일과 삶의 경계를 유지하려는 경계 설정 기반 동기다. 무조건적으로 업무를 감내하기보다는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역할과 책임의 범위를 설정하는 것이 장기적인 진료 지속에 중요한 요소로 분석됐다.
이번 연구는 중증응급의료 인력 정책이 사명감 있는 의료진을 더 많이 확보하는 것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현장 전문의들이 갖고 있는 내적 동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과도한 업무 부담을 줄이고 안정적인 인력체계를 구축하는 한편, 의료소송 등 사법리스크에 대한 제도적 보호와 적정한 보상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중증응급의료 전문의를 현장에 붙잡아두는 것은 얼마나 더 희생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계속 진료할 수 있는 조건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의 문제라는 것이 이번 연구의 핵심이다.
연구진은 중증응급의료 전문의 인력 정책이 개인의 헌신에 의존하기보다 지속 가능한 근무 환경과 제도적 보호를 마련하는 방향으로 설계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이어 이번 연구에서 도출된 네 가지 내적 동기 유형은 개인의 동기 특성과 경력 단계에 적합한 맞춤형 동기 지원 전략 및 교육 과정 개발, 의료 인력 통합 전략 수립의 근거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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