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플 플러스
백거이(白居易), 늙음을 노래한 시
예부터 인간에게 늙음과 수명은 늘 경외와 탄식의 대상이었다. 한대(漢代)의 고시에서는 사는 나이 백을 못 채우면서 늘 천년의 근심을 품는다라고 했고, 시성 두보는 인생 칠십 살기 예부터 드물다(人生七十古來稀)라며 삶의 유한함을 노래했다. 성경 시편 속 모세의 기도 역시 빠르게 지나가는 인생의 허무함을 고백한다.
여기, 유한한 인생길에서 75세까지 천수를 누리며, 어떤 시인보다 늙음을 치열하고도 담담하게 기록한 시인이 있다.
중국 당대(唐代)를 대표하는 대시인 백거이(白居易772846)가 인생 후반기에 남긴 시들을 중심으로 한역과 해설을 함께 수록한 시선집이 출간됐다.
류성준 전 한국외국어대 동양학대학장과 유형준 한국의사시인회 초대회장(전 한림의대 교수)가 백거이, 늙음을 노래한 시를 펴냈다.
백거이는 평생 2831 수의 방대한 작품을 남긴 중국 문학사의 거장으로, 특히 만년(65세 이후)에는 늙음, 질병, 가족과 벗, 인간관계, 세월의 흐름 등을 주제로 한 시를 다수 남겼다.
이 책은 이런 작품들 가운데 노년의 삶과 정서를 담은 시들을 중심으로 구성해, 독자들이 백거이의 깊은 인간적 성찰과 담담한 삶의 태도를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도록 했다.
백거이의 노년시는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유한함을 깊이 통찰하고, 세월의 흐름을 받아들이며 삶을 성찰한 기록이다.
초고령화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백거이의 노년시는 깊은 공감과 위로를 전한다. 삶의 후반기를 준비하거나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는 독자들에게 의미 있는 성찰의 계기로, 한문과 중국 고전문학에 관심 있는 독자는 물론 삶과 노년의 의미를 탐구하고자하는 이들에게도 유익한 읽을거리로 다가선다.
이 시선집은 백거이가 노년에 마주했던 인간적인 고뇌와 초연한 깨달음의 순간들을 고스란히 현대 독자들에게 옮긴다. 64제 75수가 수록됐으며,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해설 부분에 참고 시 33제 33수(백거이 시 22수, 기타 시 11수)를 더해 총 97제 108수의 시편을 담았다.
백거이의 생애와 시 세계를 간결하게 압축해 서두에 배치함으로써, 고전이 낯선 이들도 자연스럽게 책 속으로 걸어 들어올 수 있도록 안내한다. 본문은 백거이가 만년에 느꼈던 감정의 궤적을 따라 총 7개의 주제로 분류해 독자들이 시인의 내면과 부드럽게 공명하도록 꾸몄다.
이 시선집은 중문학자인 형(성준)과 의사이자 시인인 동생(형준)이 의기투합해 빚어낸 소중한 결실이다. 걸어온 길은 달랐지만, 두 형제는 태생적으로 공유한 신앙과 감성, 어느덧 함께 노년에 접어든 삶의 시간 속에서 서로의 지혜를 모았다.
형은 백거이의 방대한 시 세계에서 늙음과 연관된 정수를 엄선해 정확한 한역과 꼼꼼한 주석, 깊이 있는 해제를 맡았다.
동생은 글을 다듬고 윤문하며, 의학자로서 바라본 노년의 질병과 신체적 변화에 대한 진단, 시인으로서의 감흥을 진솔한 감상으로 보탰다.
중국 고전시라는 하나의 주제를 두고, 중문학자와 의사라는 서로 다른 영역의 삶을 지내 온 두 형제가 공동으로 집필한 시도는 국내 출판계에서도 매우 드문 뜻깊은 도전이다.
중문학자의 엄밀한 고증 위에 의사이자 시인의 따뜻하고 냉철한 시선이 깊이 있게 녹아든다.
형제는 첨단 과학 시대의 분주함 속에서, 모쪼록 이 시선집이 마음에 한 자락 여유를 채우며, 저마다 마주한 나이듦의 여정에 따뜻한 공감과 위로가 되기를 소망한다.
늙는 대로(任老)
맘 편히 밭이랑에 봄빛 지는 걸 보며
뜰 앞에 기대니 해그림자 기운다.
얼굴 검고 눈 흐리며 머린 눈같이 희니
늙은 모습에 더 보탤만한 게 없다.
억지로 목표를 이루려 애쓰지 않고, 그저 계절이 지나가는 걸 바라본다.
하루 일상의 끝에 기대어 서서, 해그림자처럼 기우는 인생을 본다.
겉모습, 신체 기능, 어디에 무엇을 보아도 늙음의 무늬가 뚜렷하다.
세월의 순리 앞에 공연한 체념과 비관은 사치에 불과하다.
늙음은 부족이나 상실이 아니라, 이제 더할 것도, 덜 것도 없는 평정한 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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