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플 플러스
"소송 과정 자체가 형벌…'기소' 공포에 필수의료 '포기'
산부인과와 소아청소년과 등 필수의료 붕괴를 초래하는 법적 리스크의 실체는 형사 고소 남발과 무거운 민사상 배상 책임을 결합한 복합적 소송 구조와 소송 과정 자체의 압박 때문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경북의대 이정현박준원(의학과), 박준철(산부인과학교실), 김동자(법의학교실) 공동연구진은 한국의료윤리학회지 최근호에 발표한 산부인과 형사 소송에서 의료행위 관련 사법 판례 분석을 통해 이같은 진단을 내놨다. 연구진은 사법부가 의학적 불가항력성과 임상 재량을 인정해 면책하더라도, 기소 자체를 통제할 장치가 없어 수년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받는 과정의 형벌이 의사들을 분만실 밖으로 내몰고 있다고 분석했다.
연구진이 대법원 사법정보공개포털을 통해 확보한 산부인과 관련 형사 사건 판례 22건을 분석한 결과, 최종 유죄 평결은 36.4%(8건)에 그친 반면 무죄 또는 사실상 무죄 취지로 확정된 판례는 63.6%(14건)였다. 분석 대상 사건은 업무상과실치사상 등 의료과실 분야가 72.7%(16건), 낙태 및 생명윤리 관련 사건이 27.3%(6건)을 차지했다.
연구진은 사법부가 의료 행위의 내재적 한계와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 대표적 사례로 제왕절개 수술 후 발생한 폐혈전색전증으로 산모가 사망한 사건(대법원 2004도486)을 꼽았다.
당시 하급심은 사후 부검 결과를 토대로 의사가 폐색전증을 예견할 수 있었음에도 조치를 소홀히 했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수술 후 나타난 빈맥과 발열은 비특이적 증상이며, 출혈 위험이 상충하는 상황에서 항응고제를 투여하지 않은 의사의 결정은 합리적 임상 재량권의 범위 내에 있다면서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의료사고 이후 결과만을 놓고 역산해 과실을 따지는 사후 확신 편향을 사법부가 엄격히 경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대법원은 예측이 불가능하고 치명적인 양수색전증 사건(대법원 97도2225)에서 의학적 사실에 기초해 질환 자체의 불가항력성을 인정해 의사의 손을 들어줬다. 또한 돌발적인 이완성 자궁출혈 사건(대법원 97도1678)에서도 의사가 자궁수축제 투여, 중심정맥압 측정, 수액 및 혈액 공급 등 표준적인 응급 프로토콜을 단계적으로 수행했다면 결과가 치명적이라도 형사 책임을 묻지 않았다.
반면, 제왕절개 수술 중 대량 출혈이 예견되는 태반조기박리를 확인했음에도 환자의 혈압이 심각하게 저하될 때까지 45분간 관찰을 간호사에게만 맡긴 채 상급병원 전원을 지체한 사건(대법원 2009도7070)은 유죄로 판결했다. 의사의 부작위(마땅히 해야 할 조치를 하지 않음)와 판단 지연에 책임을 물은 것이다.
연구진은 한국 의사가 업무상과실치사상죄로 기소되는 건수는 일본의 약 15배, 영국의 약 580배에 달한다는 통계를 인용하며, 한국 의료계의 특수한 형벌화 경향을 비판했다. 주요 선진국들이 의료 사고를 주로 민사나 행정 절차로 해결하고, 형사 처벌은 극히 제한하는 것과 정반대의 행보라는 지적이다.
특히 필수의료 현장의 의사들이 분만실을 떠나는 진짜 이유는 최종 판결 결과가 아니라, 소송의 개시와 진행 과정 그 자체에 있다고 분석했다. 무죄 판결을 받기까지 수년 동안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받으며 겪는 극심한 심리적 압박, 명예훼손, 진료권 위축이 결국 고위험 분만 회피와 방어진료 강화로 이어진다는 진단이다. 여기에 민사상 손해배상 금액의 급격한 상향이 맞물린 복합적인 소송 구조가 의사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다고 지적했다.
연구진은 산부인과 환자안전사건에서 법원이 요구하는 것은 결과적 완벽성이 아니라 의학적 근거에 기반한 절차적 정당성임을 확인했다라며 의료진은 임상 판단 과정을 투명하고 충실하게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최선의 방어선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연구진은 법원이 의료과실 사건에서 의사가 악결과를 미리 예방하거나 회피할 수 있었는가를 판단할 때 기준으로 삼는 객관적 지표로 ▲응급 대응 및 전원(이송)의 적시성 ▲가용 자원의 객관적 평가 및 응급 계획 실행력 ▲감별 진단 및 객관적 검사의 충실도 ▲진찰 및 처치 과정의 안전성 등을 손꼽았다.
아울러 의료진이 지켜야 할 사법적 준수 원칙으로 △절차적 정당성의 원칙(최신 의학 가이드라인 준수) △투명한 임상 기록의 원칙(판단 근거의 문서화) △확장된 설명의무의 원칙 (진단적 불확실성 공유) △실시간 감독 및 모니터링의 원칙(위임 시 현장 입회) 등을 제시했다.
필수의료 인프라 유지를 위한 구체적인 대안으로는 ▲단순 과실에 대한 비범죄화 원칙 수립 ▲강제 수사 전 전문 사법기구에 의한 사전 조사(스크리닝) 의무화 ▲양수색전증 등 불가항력적 응급 상황에 대한 국가 책임 공적 보상 및 형사책임 면제 법제화 등을 제안했다.
연구진은 산부인과 환자안전사건에서 법원이 의료진에게 요구하는 것은 결과적 완벽성이 아닌 의학적 근거에 기반한 과정임을 확인했다면서 연구를 통해 도출된 예방 가능성 판단 지표와 준수 원칙들은 향후 산부인과 의료진이 법적 리스크를 관리하는 실무적 지침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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