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플 플러스
눈물이 고여 있는 심장
올해도 어김없이 한국의사시인회 사화집이 발간됐다. 닥터 K를 필두로 첫 발걸음을 뗀 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어져 온 발자취가 벌써 열네 번째다.
이 시집들은 의사시인들의 뜨거운 문학적 열망이자, 환자들의 곁에서 길어 올린 삶의 기록이다. 진료실은 세상의 모든 비명과 신음이 모여드는 곳이면서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고백이 터져 나오는 성소(聖所)이기도 하다.
인간이 숨 쉬고 아파하는 생의 한복판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지만, 가끔은 말갛게 씻긴 시어들이 고개를 내밀기도 한다. 의사에게 진찰이 육체의 고통을 읽어내는 일이라면, 시를 쓰는 일은 그 고통 뒤에 숨은 영혼의 결을 어루만지는 일일 것이다.
진료실 책상 위, 차가운 청진기와 검은 자판 사이에서 길어 올린 것은 수려한 문장이 아니다. 환자의 고통을 온전히 받아내고자 했던 의사이자 인간으로서의 분투였다.
이번 사화집 눈물이 고여있는 심장에 수록된 시들은 의학적 시공간을 배경으로 삼으면서도, 그 안에는 삶의 비애와 온기가 짙게 배어 있다.
지난 주말, 인사동의 한 조그만 식당에서 한국의사시인회 제14 사화집 눈물이 고여 있는 심장 출간기념회가 열렸다.
사화집 서문의 인사말에서 서화 회장은 기다림과 재회. 이 사화집은 그러한 마음들이 모여 이루어진 작은 우주다. 문학과 의학의 경계에서 길어올린 사유와 감정들이 시가 되어 서로를 비추고, 다시 누군가의 마음을 밝혀주리라 믿는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한국 문학평론가협회 회장이자 월간 현대시 현대비평 주간으로 활동하고 있는 오형엽 교수의 문학특강도 진행됐다.
시적 강도와 밀도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시적 표현은 크게 묘사와 진술로 구분되는데, 최근 시에서 묘사보다 진술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 이 현상은 정형시로부터 벗어나 자유시의 내재율을 실험하고 그 연장선에서 산문시로 전개되는 경향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 질문에 대답하려 할 때 우리는 시적 강도와 밀도에 대해 사유할 필요를 느낀다고 했다.
너무 아름답고 빛나서/ 보이지 않는 詩,/ 의미가 없어진 詩,/ 너무 순하고 깨끗해서/ 이해할 수 없는 詩,/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詩,/ 혈혈단신의 몸이 다시 되어/ 그 詩 속에 들어가 살고 싶다./ 그 詩의 눈물에 빠져/ 끝없이 헤엄치고 싶다. -「잡담 길들이기 7」 전문
산문시와 자유시를 동시에 시도하면서도 시적 강도와 밀도를 동시에 추구하는 마종기 시인의「잡담 길들이기 7」에 대한 소개도 있었다. 사소한 일상의 경험에서 투명하고 순수한 시의 언어를 길어내는 마종기 시의 특징과 함께 시의 언어 속에 기쁨과 슬픔, 충만함과 외로움이 함께 스며있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축하 모임에는 김영찬, 황정산, 정윤천 시인을 비롯해 시와 시간들 관계자 여러 명이 참석해 따뜻한 분위기를 더했다. 게다가 신입 회원 두 명도 함께해 어느 해보다 풍성한 자리가 되었다.
서귀포열린병원 영상의학과 전문의로 근무 중인 고현심 시인은 시집 파동의 서를 발간했다.
의학이 몸의 언어를 읽는 일이라면 시는 마음의 언어를 듣는 일이라 생각한다. 오랫동안 초음파실에서 수많은 생의 진동을 마주하며 깨달은 것은, 그 안에는 언제나 말로 닿을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피어난 파도의 잔향을 시의 언어로 전하고자 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2020년 시와 소금으로 등단, 시집 여름이 가도 나는 너를 잊지 못한다를 상재한 바 있는 박영미 시인은 현재 이화의대 분자의과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시는 언제나 그리움을 부르는 작업이었다. 부재하는 것이 어딘가 존재하리라는 희망은 용기를 가져오고야 만다. 부재는 소멸이 아니라 그리움이라는 소통을 매개로 고된 삶의 해방구가 되어 준다. 상실의 일상에서 시가 위로가 된다면 좋겠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한국의사시인회 창립 회원으로 본회의 발전에 헌신해 온 박언휘 시인은 청진기 너머 들려오는 거칠고도 간절한 숨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리듬입니다. 메스 끝에서 멈칫거릴 때, 우리는 비로소 거대한 생명의 흐름 앞에, 인간이 얼마나 작고 겸손해야 하는지를 배웁니다라고 시인의 말을 통해 오랜만에 참석한 소회를 대신했다.
눈물이 고여있는 심장은 몸속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슬픔이다. 존재와 삶의 바탕이 다름 아닌 눈물과 상처라니. 슬픔이 삶의 중심을 장악하고 있는 이 모순된 감정을 풀어내고자 오늘 이자리에 모인 것인지도 모른다.
축하의 자리는 소박했으나 분위기는 더없이 차분하고 묵직했다. 내빈 소개와 함께 가벼운 술잔이 오가고 이내 문학의 장으로 빠져들었다.
번잡한 음주가무 대신 낮게 읊조리는 시 낭송이 이어졌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다정한 목소리와 의사 시인으로 감당해야 하는 창작의 무게가 대화의 주를 이루었다. 다 같이 기념촬영을 하고 함께 만찬을 나눈 게 전부였지만, 호텔 연회장 못지않은 따뜻함과 충만함이 있었다.
자리를 옮겨 찾아간 인사동의 한 전통찻집에서 대추차와 쌍화차의 알싸한 향을 맡으며 우리는 다시금 화두를 던졌다. 몸의 위기, 시의 위기, 그리고 이 시대 문학이 마주한 본질적인 위기에 대한 나름의 진단이 이어졌다.
다가오는 총회와 문학기행에 대한 기대, 그리고 한국의사시인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고민으로 분위기는 고조됐다. 우리 안의 시적 열망은 어느새 뜨거운 동심원을 그리며 부풀어 올랐다, 찻잔이 식어가는 줄도 몰랐다. 의업을 받들고 시인의 사명을 다하는 일. 그 두 겹의 소명이 이 작은 자리에서 다시 한번 조용히 새겨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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