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플 플러스
한국의 '환자기본법'과 프랑스의 '쿠슈너법'
프랑스의 쿠슈너 법(Loi Kouchner, 2002)은 현대적 의미의 환자기본법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 법은 환자의 권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의료체계 전반을 환자 중심의 관점에서 들여다보기 시작한 역사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고 평가받는다.
최근에 세상을 떠난 리오넬 조스팽 프랑스 전 총리의 주요 업적이기도 한 프랑스판 환자기본법은 정식 명칭으로는 환자의 권리와 의료체계의 질에 관한 법(Loi relative aux droits des malades et a la qualite du systeme de sante, 2002)이다.
당시 프랑스는 의료사고(특히 HIV 감염 사건 등)로 인한 사회적 불신과 의사 중심에서 환자 중심의 패러다임 전환이 요구되던 시기였다.
환자의 권리를 명시적으로 법제화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환자는 치료의 객체가 아니라 권리의 주체로서 인식 전환의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된 것이다.
쿠슈너 법은 단순한 환자의 권리 선언이 아니라, 환자기본법으로 세 가지 형태의 핵심 축으로 구성된 포괄적인 법인데, 그 축은 환자의 권리, 의료사고 및 피해구제 제도, 의료체계의 질 및 민주성 강화 등으로 구성돼 있다.
본질에 충실한 환자권리장전 쿠슈너 법 무과실 국가배상 도입 최소 안전장치 확보
쿠슈너 법안을 환자 권리의 중심으로 해석하자면, 첫째 환자의 알 권리로써 환자는 자신의 건강 상태, 치료 방법, 위험성에 대해 충분하고 이해가 가능한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와 의료정보 접근권(진료기록 열람권 포함)의 보장, 그리고 설명의 의무를 법적 권리로 격상시킨 것이다.
두 번째 환자의 권리는 자기 결정권인데, 모든 의료행위는 환자의 자유롭고 명시적인 동의가 필요하며, 치료 거부와 생명 유지, 치료 중단 등에서 의료행위의 정당성이란 의학적 필요성를 넘어 반드시 환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세 번째는 환자 권리로써 인간 존엄성과 프라이버시 보호 권리인데, 환자의 존엄성, 사생활, 비밀 유지 권리 명시와 입원과 치료 과정에서 인격권을 보호받는 것이다.
네 번째 환자 권리는 말기 환자 및 임종 관련 권리로써 고통 완화 치료의 권리와 연명의료 중단에 관한 논의의 법적인 토대를 마련했다.
다섯 번째 권리는 환자 참여 및 대표성 권리로 병원 내 환자위원회 설치하고 환자 단체의 제도적 참여를 보장하여 환자를 정책 참여자로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쿠슈너 법의 가장 중요한 제도적 특징 중 하나는 의료사고 피해구제 제도라는 핵심적인 혁신 사안으로 무과실 국가 배상제도의 도입이다.
즉 의료과실이 없어도 일정한 환자의 피해에 대해 배상하는 것이고, 국가가 일정 부분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조사와 보상의 전문기구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현재 프랑스 지역 의료사고 조정위원회와 국가 의료사고 배상기구인 ONIAM은 이미 잘 알려진 기구로 의료사고를 소송 중심에서 합리적인 행정 시스템의 기반 위에 신속한 배상체계를 마련하는 것이다.
쿠슈너 법은 이후에 여러 국가의 환자 권리 법에 큰 영향을 미쳤고, EU의 환자 권리 논의의 기준 모델이 됐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한국형 환자 권리 장전과 관련 논의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최근 우리나라 환자기본법의 법안 통과가 의미하는 것은 환자의 선언적 권리가 실효적인 법적 권리로 전환됐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환자기본법이 프랑스와 다른 점은 환자기본법이 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의 통과를 위한 일종의 패키지 법안의 성격을 지녔다는 점이다.
즉, 환자의 권리를 강화하는 동시에 의료 분야의 형사 범죄화 완화에 목적이 있어 두 개의 법안을 동시에 추진해 왔다. 그래도 정작 프랑스처럼 무과실 배상에 관한 논의는 없어 보인다.
다만 의사가 책임배상에 가입하고, 사고에 대한 설명을 잘하고 환자가 동의하면 형사처벌을 감면할 수 있다는 일종의 특례를 부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특례가 아닌 우리나라가 만든 인위적 특례를 위한 분쟁조정법으로 과연 필수 의료가 되살아날지는 논란의 여지가 너무 많아 보인다.
인위적 특례 패키지 성격 한국형 의료분쟁조정법안 필수의료 소생 가능성에 의문시
프랑스의 환자기본법에서 환자 단체의 참여 강화는 병원의 정책 참여를 의미하는데, 우리나라의 기본법은 등록된 환자 단체에 대한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지원 등 환자 단체 육성에 관한 조항과 환자 정책위원회를 골자로 하여 보건의료정책과는 별도의 환자 정책에 대한 새로운 지배구조를 창출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미 다른 법에서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의사 인력 수급 추계위원회 등 환자 단체가 최고의 상위 정책 결정 기구에 포진해 있는 것도 부족한지, 국제적으로 예외적인 수준의 환자 참여를 법제화 했다.
환자 단체의 정책 참여 확대는 대표성과 운영 기준이 불명확해 전문성과 책임상의 문제도 존재한다.
프랑스에서 환자기본법에 의한 환자의 수혜는 무엇보다도 현재 연간 3000억원 규모의 예산을 집행하는 의료사고 무과실 국가 배상제도를 정착시킨 것이다.
프랑스는 환자에 대한 권리 존중으로 무과실에 한해 국가가 책임지고 배상하고, 이를 사회적 연대를 통한 방법으로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다.
영국은 의료사고에 대한 배상을 NHS Resolution으로, 그리고 몇몇 진보적인 나라들은 아예 과실 여부를 따지지 않는 무과실 배상주의를 시행하고 있다.
프랑스는 환자기본법이 독립된 법이 아니라, 공중보건법에 포함돼 있는 형태인데 반해, 우리나라는 이미 타 법령에 규정된 것을 새로운 법안에 중복으로 규정하고 있다.
쿠슈너 법의 핵심 내용을 요약해 보면, 의료행위의 정당성은 정보권과 동의권의 결합이고, 무과실 보상은 사회적 연대를 위한 국가책임이며, 의료 민주주의를 제도화하기 위해 병원에 환자나 환자 단체의 참여를 유도하고 법제화한 것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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