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플 플러스
의대 증원 사태에 대한 현실 인식
현재 대한의사협회 회장과 집행부를 향해 쏟아지는 사퇴 압박과 의협 대의원회 운영위원회에서 임시총회에 상정한 비대위 구성을 위한 안은 위험한 생각일 수 있다.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수장을 교체하여 분위기를 쇄신하고자 하는 열망은 이해할 수 있으나,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지금 의협 리더십이 무너진다는 것은 단순히 인물을 교체하는 차원을 넘어, 지난 수개월간 전방위적인 압박 속에서 축적한 협상의 노하우와 앞으로 치열하게 싸워나가야 할 의료정책과 제도에 대한 투쟁력과 협상력을 포기하는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처럼 정부가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와 수가 압박이라는 더 가혹한 무기를 들고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우리 내부의 구심점을 스스로 파괴하는 행위는 대치하고 있는 적에게 성문을 열어주는 것과 다름없다. 리더십이 흔들리는 순간,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 의료계를 더욱 거세게 몰아붙일 것이다.
파편화된 목소리를 하나로 묶은 집행부의 노력
이번 의대 증원 저지 투쟁 과정에서 집행부가 수행한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제도권 틀 안에서 의료계의 목소리를 체계화 데 있다.
의료계 내부에는 대학교수협의회, 전공의협의회, 의대생, 그리고 각과 개원의협의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해관계와 목소리가 존재한다. 집행부는 이 파편화된 의견들을 수렴해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보정심)와 의력인력수급추계위원회(추계위)라는 공식적인 테이블 위에서 논리적 대응 카드로 정제해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정부의 일방적인 발표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을 넘어, 객관적인 수치와 법리적 근거를 바탕으로 의료계의 정당성을 피력했다.
특히 정부가 의도적으로 누락하거나 왜곡하려 했던 추계 결과의 우선순위를 바로잡으려 노력한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감사원 감사 청구까지 검토하며 법적시스템적 견제 장치를 가동한 점은, 단순히 거리로 나가는 것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실질적인 압박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집행부의 사투가 있었기에 정부도 자신들의 입맛대로만 숫자를 던지지 못하고 의료계의 눈치를 보며 수치를 조정해야만 했다.
2027년, 그리고 그 너머의 난제들: 리더십 없이는 대안도 없다
의대 증원 문제는 이번 결정으로 마침표를 찍는 게 아니다.
우리 앞에는 2027학년도 이후의 정원 조정 문제, 고사 직전인 필수의료 살리기, 지역의료 불균형 해소 등 산적한 과제들이 줄을 잇고 있다. 이 모든 난제는 고도의 전문성과 지속성 있는 협상력을 요구한다.
만약 지금 책임추궁에 급급해 의협의 시스템을 무력화하고 그 과정에서 의료계가 분열된다면 14만 회원을 대변할 결사체가 사라지게 된다.결사체가 사라진 의료계는 정부의 각개격파 전술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리더십이 부재한 상황에서 개별 직역이나 지역별로 목소리가 갈라진다면, 정부는 이를 의료계의 분열로 규정하고 자신들의 정책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삼을 것이다.
결국 그 피해는 고스란히 회원 전체의 몫으로 돌아오게 된다. 지금의 집행부를 비난하는 것은 분노를 그저 배출하려는 움직임에 불과하다. 의료계는 단순한 분노의 표출이 아니라 앞으로 다시 펼쳐질 협상의 과정에서 전열을 재정비하는 게 필요한 때이다.
비난 대신 전열의 정비를 선택해야 할 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차별적인 비난이 아니라, 리더십을 중심으로 전열을 재정비하는 지혜다. 완벽한 승리가 아닐지언정,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전선을 유지하며 버텨온 집행부의 노고를 인정해야 한다. 부족한 점이 있다면 내부적인 토론과 정책 제안을 통해 보완해 나가야하는 게 현실적인 상황이다.
우리가 가진 논리를 더욱 견고히 다지고, 정부의 다음 수에 대비하기 위한 전략을 수립하는 데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 리더십이 건재해야만 시스템이 돌아가고, 시스템이 돌아가야만 앞으로 남은 긴 여정에서 우리의 권익을 지켜낼 희망이 생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과 대한민국 의료의 미래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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