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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플 플러스

시간의 파도에도 무너지지 않는 것 

황건 이화의대 해부학교실 초빙교수2025.12.22 09:17
황건 이화의대 해부학교실 초빙교수
황건 이화의대 해부학교실 초빙교수

나는 한 세기를 건너온 한 사람의 목소리를 알고 있다. 그것은 전투의 함성도, 승전의 나팔도 아니다. 수술실의 침묵 속에서 이어져 온,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멈추지 않았던 한 군의관의 낮은 호흡이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공군 군의관으로 복무했고, 이후 미국에서 외과의로 평생을 보냈다.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지 않았다. 같은 전쟁을 겪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말과 글을 읽을 때면, 내가 지금 서 있는 병원 복도와 그가 한때 걸었을 야전병원의 바닥이 겹쳐 보인다. 시간은 우리를 멀리 떼어 놓았지만, 기억은 그 간격을 조용히 메워 왔다.

그는 최근 내가 쓴 백마고지 기행문을 읽고(백마고지에서 배운 책임의 언어, 국방일보 2025. 12. 16. 제18쪽, https://kookbang.dema.mil.kr/newsWeb/20251216/1/ATCE_CTGR_0050030000/view.do), 시간의 흐름과 기억, 그리고 추억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젊은 시절 읽었던 작은 책 아라비아 사람의 천막 속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조차 시간의 파도 앞에서는 무너질 수 있지만, 그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 있다고. 그것은 바로 추억이라고.

나는 그 문장을 읽고 오래 멈추어 서 있었다. 전쟁은 시간을 상처로 만든다. 상처는 아물어도, 시간은 그 자국을 기억한다. 그러나 추억은 다르다. 추억은 견디는 힘이다. 시간이 몰아쳐도 무너지지 않도록, 삶의 구조를 안쪽에서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기둥이다.

백마고지에서 내가 느꼈던 침묵도 그러했다. 포성이 멎은 자리, 말라버린 능선, 그리고 이름 없이 사라진 수많은 생명들. 그곳의 침묵은 공백이 아니었다. 그것은 말을 기다리는 침묵이었고, 이어질 책임을 요구하는 침묵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썼다.

백마고지의 침묵은 잊힘이 아니라, 우리에게 남겨진 약속이다.

그는 이 문장을 읽고 제1차 세계대전의 추모시, 존 맥크레이의 In Flanders Fields 마지막 행을 떠올렸다고 했다.

If ye break faith with us who die. 그는 이 문장에서 faith를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약속으로 읽는 것이 더 어울린다고 했다. 힘이 빠져 가는 손으로 다음 세대에게 봉화를 건네며, 싸워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잊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약속 말이다.

그 해석은 내 마음에 깊이 남았다. 믿음은 흔들릴 수 있지만, 약속은 관계 속에서 지속된다. 그리고 그 약속이 지켜질 때, 시간은 비로소 극복된다. 누군가는 지켜 왔고, 누군가는 이어 왔으며, 이제는 우리가 그 약속을 잠시 맡아 들고 있다.

그의 삶은 그 약속의 한 형태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는 칼을 내려놓지 않았다. 국적이 바뀌고 언어가 달라져도, 그의 손은 여전히 사람의 몸을 살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영웅적 서사가 아니라, 조용한 지속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지속이 시간을 이긴다.

나는 지금 군의관으로서, 그가 지켜 온 약속의 연장선에 서 있다. 전방에서 후송된 장병들의 얼굴과 손을 수술할 때마다, 나는 알지 못하는 이름들과 마주한다. 그러나 그 이름들 뒤에는 언제나 과거의 약속이 있다. 누군가는 지켰고, 누군가는 이어 왔으며, 이제는 내가 잠시 맡아 들고 있는 봉화다.

이 글을 한 노(老) 군의관에게 바친다. 한 세기를 건너 우리에게 도착한 기억의 증언으로서, 그리고 시간의 파도에도 무너지지 않는 것의 실체로서. 우리가 기억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과거에 머무르기 위함이 아니라, 미래를 지키기 위함임을 그는 이미 삶으로 보여 주었다.

시간은 모든 것을 씻어 간다. 그러나 약속은 남는다. 그리고 그 약속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살아 있을 때, 역사는 다시 숨을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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