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플 플러스
다시 입는 가운의 무게: 무너진 신뢰의 터 위에서 찾은 소명
1. 혼돈과 각성: 온실 밖으로 내던져진 자아
2024년, 대한민국 역대 최악의 의정갈등이 터졌을 때, 나는 의과대학 6학년이었다. 국가고시를 목전에 둔,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순탄하게 정해진 길을 걷고 있다고 믿었던 시기였다. 휴학이라는 갑작스러운 멈춤은 내게 거대한 공백을 선사했다. 매일같이 정해진 시간표와 방대한 학습량에 쫓기던 의대생의 삶이 일순간 멈추자,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아니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막막함에 휩싸였다.
휴학 초기에는 억눌렸던 휴식에 대한 보상 심리가 작용했다. 하지만 이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백수 생활이 스스로를 피폐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다시 학생의 본분으로 돌아가 공부를 하면서도, 생계와 경험을 위해 과외와 아르바이트라는 사회의 일부로 뛰어들었다. 일주일에 6일 이상 타인을 가르치고 돈을 버는 행위는 내게 강렬한 이중적 감각을 일깨웠다.
돈은 잔인하도록 아름다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갖는 힘과 그 중요성을 피부로 느꼈고, 동시에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온 나 자신을 발견했다. 초, 중, 고, 그리고 의과대학까지, 나는 정제된 환경 속에서 비슷한 부류의 일명 엘리트 학생들과 교류하며 현실 사회와는 격리된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내가 정답이라고 배운 교과서 속 세상과, 생존과 욕망, 다양한 신념이 부딪히는 정답 없는 현실 사이의 괴리는 생각보다 거대했다. 이 온실은 나를 실패와 갈등으로부터 보호해 주었지만, 동시에 세상의 복잡성과 이면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얇은 유리벽이기도 했다.
휴학 기간은 내가 딛고 선 땅이 얼마나 편협했는지 깨닫는 시간이었다. 세상에는 실로 다양한 가치관이 존재했고, 그 가치관들이 충돌하고 조화하며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내가 그토록 분노했던 의정갈등 역시, 내가 속한 의사라는 집단의 가치관(전문성과 자율성, 환자에 대한 최선의 진료)과 사회 전체의 가치관(공공성, 형평성, 그리고 때로는 경제적 효율성)이 정면으로 충돌한 사건이었다.
초기의 나는 이 갈등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사회를 위해, 혹은 집단을 위해 개인이나 특정 집단에게 불합리성을 강제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불합리성은 단순한 손해의 감수가 아니라, 나의 정체성과 우리가 수호하려 했던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처럼 느껴졌다.
내 안에는 분노와 증오, 그리고 사회에 대한 깊은 절망감이 자리 잡았다. 하지만 나는 그 절망 속에서도 내면의 자아가 무너지지 않으려 발버둥쳤다. 규칙적인 생활, 꾸준한 공부, 독서를 통해 나 자신을 지키려 애썼다. 이는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행위가 아니라, 의사라는 나의 미래 정체성이 사회적 비난 속에서 완전히 해체되는 것을 막으려는 필사적인 방어기제였다.
니체의 사상을 빌려 과거를 돌이켜보면, 이는 맹목적으로 의무라는 짐을 지고 있던 낙타가, 모든 가치가 무너진 사막에서 느낀 실존적 공허함이었을 것이다.
이 시련은 나를 굴복시키지는 못했지만, 나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과정에서 나는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상처 없이 매끈했던 과거와 달리, 흠집이 나고 깨졌지만 그 틈으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이다. 이것이 인문사회의학이라는 새로운 렌즈를 만나기 전, 혼돈 속에서 느낀 나의 1차적 각성이었다.
2. 성찰과 재구성: 무너진 신뢰의 터 위에서
휴학 중 나를 휩쌌던 거대한 분노는 왜 우리를 증오하는가였다. 하지만 이 질문은 답을 주지 못했다. 인문사회의학 수업에서 프라이드슨(Eliot Freidson)을 만나고 나서야, 나의 질문은 이 증오와 불신의 구조는 어디에서 기인했는가라는 이성적 성찰로 이동했다.
감정의 격랑이 지나간 자리에, 차가운 질문들이 떠올랐다. 이 거대한 불신의 심연은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내가 겪은 불행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전문직업성(Professionalism)이라는 사회적 계약이 오랜 기간 서서히 침식되다가 마침내 파괴되는 현장이었다. 나는 그 거대한 구조적 붕괴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사회가 의사를 불신하고 상호 호혜성이 무너질 때,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결국 환자이며, 이는 의료 시스템 전체의 붕괴로 이어진다.
폴 스타(Paul Starr)는 의학, 정치, 돈에서 의사라는 직업이 주권적 전문직(sovereign profession)으로서 문화적 권위(cultural authority)를 획득해 온 과정을 분석한다.
이 권위는 단순히 지식의 독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의사의 윤리성과 이타성을 신뢰하고 그들에게 자율성을 부여한 사회적 계약의 산물이다. 과학적 발전과 함께 의사 집단이 환자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할 것이라는 암묵적 서약을 했기에 사회는 그들에게 막강한 권한을 위임했다.
의정갈등은 이 계약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일방적 파기 선언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 계약이 파기된 순간, 의사가 당연하게 여겼던 사회적 역할 역시 그 기반을 잃게 됐다.
사회가 의사를 밥그릇을 챙기는 이기적 집단으로 규정하는 순간, 환자는 의사를 신뢰할 수 없게 된다.
아서 프랭크(Arthur W. Frank)가 아픈 몸을 살다에서 말했듯, 질병은 한 인간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혼돈 그 자체다. 환자는 이 혼돈 속에서 자신의 고통을 증언하고 길을 안내해 줄 가이드로서 의사를 필요로 한다. 환자는 자신의 무너진 몸과 삶의 이야기를 의사에게 들려주고, 의사는 전문적 지식으로 그 이야기에 진단과 치료라는 질서를 부여하며 질병 내러티브를 함께 써 내려간다.
그러나 의사를 불신하는 환자는 이 내러티브의 가장 중요한 공동 저자를 잃고 홀로 고통 속에 고립된다. 과외와 아르바이트를 하며 만난 현실 속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떠올릴 때, 질병 내러티브의 중요성은 더 절실하게 다가왔다. 환자가 의사를 불신할 때, 그들은 단순히 의학적 조언자가 아닌 자신의 무너진 삶의 이야기를 들어줄 유일한 가이드를 잃게 되는 것이었다.
의사의 말을 검증하고 의심해야 하는 상황에서, 환자는 검증되지 않은 정보의 홍수 즉 엘리엇 프라이드슨(Eliot Freidson)이 말한 시장 논리의 폐해 속에 표류하거나, 절망감 속에 치료 자체를 포기할 수도 있다. 신뢰가 사라진 진료실에서 환자는 가장 강력한 치유의 도구인 관계를 상실한다. 의사의 공감 어린 말 한마디가 줄 수 있었던 위안과 치유의 힘은, 불신의 장벽 앞에서 무력해진다.
나아가, 피터 프로노보스트(Peter Pronovost)가 존스 홉킨스도 위험한 병원이었다에서 강조했듯이, 환자 안전은 신뢰를 기반으로 한 시스템과 문화에서 비롯된다.
안전한 병원은 완벽한 의사 개인이 아니라, 실수를 인정하고 공유하며 시스템을 개선하는 투명한 문화에서 탄생한다. 의사가 사회로부터 불신으로 인해 방어적으로 변한다면, 의료 오류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시스템을 개선하려는 자발적 노력들은 위축된다. 프로노보스트가 말하는 안전 문화는, 수치심을 극복할 수 있는 심리적 안전감이 전제돼야 한다.
그러나 사회가 의사를 잠재적 범죄자나 이기주의자로 볼 때, 이 심리적 안전감은 완전히 사라진다. 불신은 방어 진료를 낳고, 방어 진료는 결국 환자의 안전을 위협한다. 의사는 소송의 위협 앞에서 최선의 진료가 아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진료를 택하게 된다.
이는 불필요한 검사, 치료의 지연, 그리고 비용 상승이라는 악순환을 만들어내며, 이는 다시금 이익만 좇는 의사라는 사회적 비난을 강화하고 신뢰를 더욱 무너뜨린다. 결국, 불신은 환자 안전 시스템의 근간을 좀먹는 독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 무너진 신뢰를 전문직업성에 입각해 다시 세워야 하는가?
엘리엇 프라이드슨(Eliot Freidson)은 프로페셔널리즘, 제3의 논리에서 그 답을 명확히 제시한다. 프라이드슨은 전문직업성을 시장 논리(소비자주의)와 국가 논리(관료주의)에 맞서는 제3의 논리로 규정한다.
시장의 논리에서 환자는 소비자이며 의료는 상품이다. 하지만 가슴에 통증을 느끼는 환자는 가장 저렴한 심장 수술을 쇼핑할 수 있는 합리적 소비자가 아니다. 질병은 개인의 정체성, 미래, 그리고 삶의 의미까지 뒤흔든다. 이런 극도의 취약성과 불확실성 속에서 환자를 단순 소비자로 규정하는 시장 논리는 폭력적일 수 있다.
반대로 국가의 논리는 의료를 통제와 효율의 대상으로 본다. 하지만 질병은 너무나 개별적이고 복잡해 국가의 획일적인 관료주의 매뉴얼로만 통제할 수도 없다. 표준화된 지침은 존재하지만, 모든 환자의 고유한 상황(직업, 가족 관계, 삶의 가치관)을 반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80세 노인의 폐암 치료는 40세 가장의 폐암 치료와 의학적으로는 같을지 몰라도, 인문학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접근을 요구한다.
전문직업성은 이 딜레마를 해결하는 유일한 논리다. 이는 자연법칙이 아니라, 수백 년에 걸쳐 사회와 전문가 집단이 합의해 온 깨지기 쉬운 약속이다. 이 약속은 사회가 의사의 전문성과 자율성을 인정하는 대신, 의사 집단은 스스로 높은 윤리적 기준을 설정하고 환자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신탁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이 신탁 관계는 의사가 자신의 이익(경제적 이익, 시간, 편의)보다 환자의 이익(건강, 안녕, 가치)을 우선시할 것이라는 사회적 믿음에 기반한다.
의정갈등은 이 제3의 논리가 붕괴하고, 국가 논리(정부의 일방적 정책)와 시장 논리(의사를 비용-효과의 대상으로만 보는 시각)가 의료를 침범한 사태였다. 어쩌면 과거의 의사 집단이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제3의 논리라는 자율성을 누리면서도, 정작 사회와 소통하고 그 신탁 관계를 증명하는 데는 소홀했기 때문에(혹은 엘리트주의적 태도로 비쳤기 때문에) 신뢰의 기반이 이미 약해져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의사-사회-환자의 신뢰를 회복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의사의 권위를 되찾기 위함이 아니라, 질병이라는 혼돈 속에서 가장 취약한 상태에 놓인 환자를 보호하고,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의료라는 영역을 지탱할 유일한 버팀목이기 때문이다. 이 버팀목이 무너지면, 환자는 시장의 상술이나 국가의 획일성 앞에서 홀로 내던져지게 된다.
3. 소명과 다짐: 증오를 넘어선 어린아이의 긍정으로
온실 밖에서 마주한 차가운 현실과 교실 안에서 배운 전문직업성의 붕괴는 나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나는 왜 의사가 되려 하는가?
휴학 이전, 나의 대답은 엘리트 학생의 모범 답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안정적인 삶, 지적 성취, 막연한 봉사 정신. 어쩌면 그것은 괴테(Johann W. Goethe)의 파우스트가 당대의 모든 학문을 섭렵하고도 만족하지 못한 채 더 높은 지식과 가치를 추구했던 것처럼, 현실의 고통과 분리된 채 관념적인 가치만을 좇는 공허한 욕망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혼란을 겪은 지금, 나의 대답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정신의 세 가지 변신을 말했다. 맹목적으로 전통과 의무의 짐을 짊어지는 낙타, 기존의 모든 가치에 분노하며 아니라고 외치는 사자, 그리고 마침내 이 모든 파괴와 상처를 긍정하고 자신만의 가치를 새롭게 창조하는 어린아이가 그것이다.
이번 사태는 나의 무력함과 함께, 모두에서 고백했듯 사회를 향한 증오와 분노를 끌어냈다. 나는 기존의 전문가 정신이라는 가치가 무너지는 것을 보며 저항하는 사자의 단계에 서 있었다. 너는 해야만 한다(Thou Shalt)는 사회의 낡은 명령과 시스템의 붕괴라는 거대한 용 앞에서, 나의 증오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자는 파괴할 뿐, 창조하지 못한다. 그 증오(Ressentiment)에 머무르는 한, 나는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나의 개인적 상처와 집단적 분노를 뛰어넘어 훌륭한 의사를 꿈꾸는 지금, 나는 어린아이의 신성한 긍정으로 나아가야 함을 깨달았다.
이제 나의 전문직업성은 과거 세대가 물려준 낙타의 짐이 아니다. 그것은 사자의 분노를 거치고, 이 무너진 신뢰의 터 위에서 어린아이처럼 새롭게 놀이하고 창조해야 할 나만의 가치다.
나는 무너진 신뢰를 다시 세우는 의사가 되고 싶다. 과거 세대의 의사들이 사회로부터 주어진 신뢰 위에서 진료했다면, 이제 나의 세대는 매 순간의 진료 행위를 통해 그 신뢰를 증명하고 획득해야 하는 숙명을 안게 되었다. 과거보다 훨씬 더 무겁고 고된 길이지만, 동시에 나의 직업적 소명을 더욱 명확하게 만들었다.
신뢰는 더 이상 공기처럼 주어진 전제가 아니라, 내가 매일의 진료실에서 피땀 흘려 쌓아 올려야 할 결과물이 됐다. 그것은 피곤한 기색 없이 5초 더 환자의 눈을 맞추는 것, 복잡한 의학 용어 대신 환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한 번 더 설명하는 것, 확실하다는 오만한 확신 대신 최선을 다해 돕겠다는 겸손한 약속을 건네는 것에서 시작된다. 나는 이렇게 작은 신뢰의 조각들을 매일 쌓아 올리는, 장인과 같은 의사가 되고 싶다.
다니엘 오프리(Danielle Ofri)가 의사의 감정에서 묘사했듯, 의사는 매일 격렬한 감정을 경험한다. 의정갈등은 이 목록에 사회적 분노와 소외감을 추가했다.
나는 이 모든 감정을 외면하거나 억누르는 대신,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성찰의 동력으로 삼는 의사가 되고 싶다. 나의 증오를 왜 저들이 나를 미워하는가에서 저들의 분노는 어디에서 왔으며, 나는 이 불신을 넘어서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어린아이의 창조적 질문으로 바꾸는 동력으로 삼고 싶다.
환자의 고통에 공감하되, 그 고통에 매몰되지 않고, 전문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균형 감각을 지닌 의사가 되고 싶다. 환자의 불신 어린 시선 속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고, 그 시선 너머의 고통을 보려 노력해야 하는, 훨씬 더 고도화된 전문직업성을 요구받게 된 것이다.
이번 사태는 나약한 한 인간으로서 내가 피할 수 없었던 불행이었다. 하지만 이 불행을 통해 나는 성숙이라는 화두를 얻었다. 내가 성장하고 싶은 모습은 기술적으로 뛰어난 의사(Technician)를 넘어, 성찰하는 실천가(Reflective Practitioner)이자 신뢰받는 전문가(Trusted Professional)이며, 이는 곧 니체가 말한 자기 극복(Self-Overcoming)의 과정이다.
이를 위해 나는 두 가지 노력을 다짐한다.
첫째, 나의 전문성을 끊임없이 갈고 닦되, 그것이 지식의 성벽이 되지 않도록 경계할 것이다. 프라이드슨(Eliot Freidson)이 말한 제3의 논리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의사 스스로가 자신의 지식과 권위를 환자와 사회를 위해 사용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 지식이 권력이 되어 환자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자신의 질병을 이해하고 선택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도구가 돼야 한다. 이것이 나의 전문직업성을 어린아이의 창조적 놀이를 위한 굳건한 토대로 삼는 길이다.
둘째, 세상과 계속 소통할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사회와 격리된 엘리트가 아니다. 나는 이 사회의 구성원이며, 내가 겪은 고통과 내가 배운 전문 직업성의 가치를 나의 언어로 사회에 설명할 책임이 있다.
폴 스타(Paul Starr)가 말한 주권적 전문직의 시대는 저물었을지 모른다. 현대의 의사는 환자만큼 사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의료의 본질이 왜 환자 보호를 위해 중요한지를 끊임없이 설득해야 한다. 이것은 나의 사자로서의 쓰라린 경험을 어린아이의 창조로 승화시키는 전문가로서의 공적 발언(public advocacy)이다.
휴학이라는 멈춤은 나를 나약한 인간으로 되돌려 놓았지만, 그곳에서 나는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고 성찰했다. 니체의 말처럼, 이 고통과 심연조차 나의 성장을 위해 필연적이었음을 긍정하며 나의 운명을 사랑하려 한다.
이제 나는 다시 가운을 입는다. 이 가운의 무게는 예전과 다르다. 그것은 단순한 지식의 무게가 아니라, 깨어져 봤기에 더욱 소중한 신뢰의 무게이며, 그 신뢰를 이 세대에 다시 쌓아 올려야 하는 시대적 소명의 무게다.
그것은 불신 속에서도 환자의 편에 서겠다는 약속의 무게이며, 나의 개인적 상처와 증오를 뛰어넘어 이 모든 운명을 긍정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겠다는 어린아이의 다짐이자, 사회적 치유에 기여하겠다는 위버멘쉬(Ubermensch)로 나아가려는 의지의 무게다.
무너진 신뢰의 터 위에서야말로 가장 견고한 치유의 집을 지을 수 있음을, 나의 세대가 증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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