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플 플러스
아무 말 하지 않고 듣는 것만으로 시(詩)가 되는 이유
시는 세계와 불화하는 경험이다. 시가 언어예술이라는 규정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언어가 모든 이질적인 신체적정신적 경험을 특정한 방식으로 질서화표준화하기 때문이며, 시인들이 언어와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이유도 언어의 질서화표준화에서 벗어나 경험 그 자체를 드러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일상은 반복, 습관, 상식 등에서 벗어나기 어렵지만, 예술은 이런 것들을 다르게보거나 비틀려고 한다. 그래서 시, 문학, 그림, 음악 등 예술은 세계와의 불화를 드러내는 데서 출발한다.
한국의사시인회는 28일 저녁 인사동 옥정에서 열세 번째 사화집 무등산 나무의사 출판기념회를 열어, 시집에 담긴 시작(詩作)에 이르는 시간과 의미를 공유하고 문학강연을 진행했다.
이날 출판기념회에는 한국의사시인회 서화 회장, 유담 시인, 주영만 시인, 홍지헌 시인, 김연종 시인, 박권수 시인, 송명숙 시인, 박세영 시인, 윤태원 시인 등과 함께 사화집 출판사인 시산맥 문정영 대표(시인)를 비롯 동인들인 김영찬 시인, 황정산 시인, 이주송 시인, 려원 시인 등이 참석했다.
서화 회장은 의학은 사람들의 지친 몸을 치유하지만 때로는 마음이 먼저 아프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의사로서 우리는 생명의 경계에서 일하며, 시인으로서 그 경계에 핀 감정의 파행을 생각한다. 이 사화집에 담긴 시들은 그러한 순간들에서 태어났다라면서 늘 의학과 문학이 소통하는 계기가 마련되길 원한다. 뿌리는 다르지만 연리지처럼 몸통으로 합쳐지고 나아가서는 전설의 비익조처럼 문학과 의학으로 창공을 유영하고 비상하는 의사시인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고봉준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시에 대한 몇 개의 단상 강연을 통해 경험과 언어 사이에 가로놓인 간극을 돌파하고 하는 게 시의 운명이며, 그 과정에서 각자의 방식을 체득하기 때문에 시에서는 스타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시인은 자기의 세계를 구축해야 하며, 그 세계와 스타일로 평가받는다는 얘기다.
시는 어떻게 써야 할까.
시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늘 준비해야 한다. 시는 쓰는 게 아니라 오는 것이다. 무언가 왔을 때 남겨놓지 않으면 흩어진다. 올 때 마다 잘 남겨야 하기 때문에 메모도 필요하고 기억의 되새김도 있어야 한다. 마치 무당이 접신할 때 준비하는 것처럼 시인들은 언제나 자기를 훈련하고 연습해야 한다.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시도 챙겨봐야 한다. 왜 어떤 시인들은 일상적 경험에 대해서만 쓰고, 또 다른 시인들은 한사코 일상적 경험은 배제한 채 시를 쓸까. 그 각각의 이유에 다가서는 고민이 필요하다.
언어는 우리의 경험을 이상한 방식으로 조합할 수 있기 때문에 언어와의 싸움도 벌여야 한다. 시인은 어떻게 하면 같은 언어를 동일하지 않은 방식으로 전달할 수 있을지에 생각을 모은다.
나만의 문제의식과 시대정신도 필요하다.
지금 시대의 문학이나 시대정신에 대한 고민이다. 시인은 등단을 하게 되면 목표가 생기지만, 모든 시인이 목표가 있는 건 아니다. 모두가 시를 쓰지만 같은 길을 가는 것도 아니다. 시인을 포함한 예술가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대적인 것과 대결하면서 바깥으로 향하는 출구를 찾는다. 이 과정을 통해 시 쓰기는 개인적이면서도 집단적, 시대적인 것이 된다.
시는 내용의 문제만도, 형식의 문제만도 아니다. 어느 한 쪽에 얽매이면 안 된다.
아무런 양식이 없는 시대다. 한편으로는 자유롭지만 부담도 된다. 형식이나 내용보다 의미로 평가받으면 된다. 자신만의 세계를 밀고나가면서 반복하다보면 그게 자신의 스타일이 된다. 현대시는 자기의 세계와 스타일로 평가된다.
침묵이나 듣기가 시작에는 어떤 도움을 줄까.
보통 시나 문학은 자기의 느낌이나 생각을 말하는 것이라고 평한다. 그러나 시를 말하는 데 이용해야 할까. 말하는 순간 남의 얘기는 듣지 못한다. 얘기를 멈추면 들린다. 내 이야기를 쓰는 게 시라고 했는데, 내가 시를 멈추면 다른 게 채울 수 있지 않을까.
내 얘기를 멈추고, 습관을 중단하면서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다. 고정관념이나 일상적인 방식을 중단하거나 아예 하지 않음으로써 생각할 수 없었던 다른 상황 앞에 놓일 수 있다.
상식이나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 시를 침묵이나 남의 얘기를 듣는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 비우면 채워지듯이. 나를 수동적인 자리에 위치시키는 방식의 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고봉준 교수는 시는 말하기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경우 시인들은 침묵을 말하기의 다른 방법으로 사용한다. 침묵을 통한 말하기. 이는 말하기가 언제나 무언가를 쉬지 않고 떠드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라면서 어떤 경우 시인들은 말하기보다 듣기를 선호하며, 이런 행위가 시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말했다.
무등산 나무의사에는 원로 시인 초대시(마종기이원로김춘추 시인) 세 편, 홍지헌(나에게로 흘러와/유리문 밖에서/아들들 뒷모습을 보면), 김경수(이야기하는 꽃/이제 와 항상 영원히/바람이 넘어지는 풍경), 박언휘(부활을 보다/독도/행복한 여백), 박세영(무엇을 위하여/열쇠/하나로), 김세영(새로운 약속/별빛의 화법/얽힘), 박권수(2월의 봄/겨울산/인정리 장 씨), 김호준(그늘의 자리/기대의 무게/멈춰 선 순간), 송명숙(출근의 무게/물방울과 허공/개울 그림자), 손경선(혼자를 말하다/수싸움/기도를 훔쳐보다), 조광현(나무의 이야기/알츠하이머 숲/가서 도우리라), 정의홍(남도 기행3/대관령 숲길에서/야간비행), 김기범(타임리스/전시회/사월의 신부), 서화(달빛 속 사이프러스/다시 피어나는 것들을 위하여/원미산에 바람 불어오면), 주영만(흔들린다/그리움/종소리 2), 김승기(혼술/동백처럼/색즉시공), 윤태원(이상하지 않은 정신과 의원/자은도/원맨쇼), 김연종(호스피탈로피테쿠스/오이디푸스나무 그늘 아래서 설핏 잠들었다/비만을 연구하는 비만 의사), 김완(무등산 나무 의사/어머니와 대구탕/책 읽는 사람은 아름답다), 서홍관(아일랜드 격언/3년만 더 살게 해줘요/국립암센터 소망 트리), 유담(만발/안경/겨울 파도) 시인의 시 60편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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